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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밀크맨」

by *소은* 2021. 8. 24.
「밀크맨」 애나 번스 / 홍한별 옮김, 창비, 2019

▨ 아무개의 외침 ▧


「밀크맨」 은 2018년 맨부커상을 받은 작품이다.
유명한 상을 받았다는 기대감과 책 뒷날개의 심사평, 각종 언론들의 찬사 문구들이 책을 읽기 전 나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책을 읽은 시기가 7월 말에서 8월 초. 그러니까 여름의 한가운데, 아침저녁으로 열기가 식지 않았던 때이다. 책을 읽은 초반의 나의 마음도 비슷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데, 그래서 숨쉬기도 힘든데 빠져나갈 수 없는 방에 갇힌 느낌이랄까.
'나'는 열여덟 살, 밀크맨을 마흔한 살. 첫 장에 밀크맨은 죽었다고 나와있었고, 밀크맨은 유부남인데 나와 불륜관계로 소문이 나 있는 상태라고 했다. 흥미롭다고 생각됐고 밀크맨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도대체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나'의 말 글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말이 아니라 생각이다. 주인공의 생각, 의식의 흐름을 생각나는 데로 글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한 문장이 책 반 페이지를 넘나들기가 일쑤이며, 같은 이야기가 무수히 반복되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처음 접해보는 문체였고, 문장이 너무 길어서일까, 책을 읽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 무렵 곧곧에서 터져 나오는 시니컬한 하이 코미디가 책을 놓지 못하게 했다. 비아냥인 듯 진지하게 농담처럼 비장하게 던지는 말들은 주인공 '나'의 치기 어린 장난 같기도 했고 용감한 도전 같기도 했다.
「밀크맨」에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 어떤 지명도 시대적 배경도 설명되어있지 않다. 어쩌면 남자 친구, 핵 소년, 셋째 형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물 건너, 반대자, 수호자와 같은 말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책을 읽다가 배경지식의 부족함을 느끼고 답답한 마음에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었다. 나로선 좋은 선택이었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전혀 몰랐던 내가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밀크맨」은 1970년 북아일랜드 분쟁 동안 북아일랜드의 한 지역에서 열여덞 살 젊은 여성이 겪은 일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서로 대립하는 세력인 '수호자'는 물 건너 나라 (영국)에 속한 채로 있기 바라는, 주로 개신교도인 연합주의자 준군사조직이고, '반대자'는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원하는 가톨릭교도 분리주의자 준군사조직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어색했던 문체에 어느새 익숙해지고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신기한 일이다. 처음의 답답함은 어느새 없어지고 책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니......
책의 마지막 문장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처럼 나도 거의 웃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p.61)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엄마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이곳에서는 말이 왜곡되고 날조되고 과장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를 둘러싼 소문을 일일이 설명하고 사람들은 설득하려다 보면 내가 힘을 잃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묻지 않았고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서 내 정신을 분리하는 경계를 유지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서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고 온전히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엄마는 말을 끊고 끼어들지는 않았으나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일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했고 이런 식으로 자기를 속이다니 자기를 한층 더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p.86)

여기에서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극단적이어야 해


그 여자들은 우리 지역 최초의 페미니스트 집단인데 아주, 아주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로 확실하게 취급된다. 일단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상도를 벗어난다. '여성'이라는 말도 가까스로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인데. '문제'등과 같은 일반적인 단어와 결함해 어감을 좀 부드럽게 해 보아야 페미니스트와 여성이 합해지는 순간 끝난 거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문제 여성들에 대해 심하게 말한다. 뒤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한다. p.220

이들에게 대적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내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최대한 빠르고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척하면서 어떤 질문에든 계속 "모르겠어요"라고만 답하는 방법이었다. "모르겠어요"가 내 언어적 방어술 가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 그 말만 되풀이했다. p.248

나는 누워서 화장실 바닥을 곰곰이 쳐다봤다. 바닥에 얇게 쌓인 먼지, 머리카락, 내가 토하다 흘린 것 등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것은 바닥의 상태와 먼지 등이 아닌가, 오직 이런 것만이 나를 지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생각이 바뀌어 욕조 둘레의 판이나 변기가 이따금 내 모습을 비추는 화장실 벽도 나를 지탱해준다고 믿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p.326

물론 딱 맞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바로 이거다. 만약에 바로 그 사람, 내가 사랑하고 원하고 또 나를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과 진실하고 건실하고 충만하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합을 이룬데다가, 내 짝의 사랑도 식지 않고 나의 사랑도 식지 않고 두 사람 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다면? 정말로, 진실로, 그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나? 이곳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크고 지속적인 행복을 바라는 것은 과도한 일로 봤다. 그래서 의심, 죄책감, 후회, 두려움, 절망, 원망 속에서 끔찍한 자기희생을 치르며 결혼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암묵적인 필수 코스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려고 결혼을 안 하고 버텼다. p.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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