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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6」

by *소은* 2021. 8. 16.

「토지6」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길상의 고뇌 ▧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길상과 서희. 길상은 서희를 꽃 같은 애기씨로 살뜰히 모셨었고, 서희는 그런 길상에게 온전히 의지하지만 그들은 양반과 하인의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 마음을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들이 혼인에 이르기까지 만만치 않은 여정이 필수 불가결하고 그 내용이 「토지6」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점차 성숙해지고 있는 서희와 길상의 앞날이 궁금해진다. 

 

 기화라는 이름의 기생이되어 새롭게 등장한 봉선이와 세상을 떠돌던 구천이, 환이는 동학운동을 매개로 새롭게 등장한다. 조준구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한조의 아들 석이가 훌륭하게 성장했다. 석이의 앞으로의 행로도 궁금해진다.

 

 세월이 흐르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그 시대의, 그리고 그 세대의 생활과 역사를 등장인물들과 오롯이 함께 하는 재미가 이런 대하소설을 읽는 의미가 될까. 이제 소설의 삼분의 일 정도 마친 것인데 벌써부터 그들의 지난 이야기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작가의 긴 지필 시간이 얼마나 힘겨웠을까가 느껴진다. 

 

 

 언제 내렸는지 들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고와서 거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강물과 강물에서 번져나간 것만 같은 모래밭과 거의 평면으로 펼쳐진 숲, 그리고 뗏목들, 머지않아 겨울이 오고 강물이 얼어버리면 뗏목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열띤 송장환 음성을 바람 소리처럼 이제는 무심하게 들으며, 술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길상의 가슴에 돌연 뜨거운 것이 치민다. 불덩이 같은 슬픔이,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눈물 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슬픈가. 무르익은 봄날 보랏빛 꽃이 포도송이같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에는 크고 퉁겁고 윤이 흐르는 곰벌만 찾아왔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는 들판의 작은 꽃에는 무슨 벌레가 찾아드는 겔까.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p. 19

 

 

 함성 같은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서운 심연을 본 어제 충격이 가슴 바닥에서 아직 울렁거리고 있다. 두 어깨가 축 처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던 이동진의 얼굴이 크게 커다랗게 눈앞에서 확대되어 간다. 차츰 바닥에서 울렁거리고 있는 것은 실상 충격이기보다 두려움이다. 오싹오싹해지는 공포감이다. 도둑이 칼을 들고 덤비는 것보다 더한 무서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미움도 사랑도 없는 비정 그것이 아닐까. 칼 든 도둑 한 사람마저 없는 오직 한 사람이 남은 세상을 상상해보라. 하늘과 산이 무서울 것이며 들판과 시냇물도 무서울 것이다. 비정이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사람은 차츰 들판을, 산을 닮아가고 사람이 아니게 되어갈 것이다. 한 그루 나무같이 되어갈 것이며 한 덩이의 돌같이 되어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 처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인할 것을 원한다는 얘기였었소하고 이동진이 꺼내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평소 서희의 마음을 짐작했으면서도 전혀 처음 듣는 놀라움이었다. 밤길에서 허공을 디딜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리고 격렬해지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손등을 물어뜯은 것이다.  p.81

 

 "그 사람은 애기 엄마랑 혼인할 생각을 하는데도 애기 엄만 아니하겠다 그 말인가요?"

 이상한 일이다. 순간적인 심리 변화라는 것은. 서희는 거짓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쟁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드려는가.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다. 서희는 속으로 뇌며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 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든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 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p. 119

 

 봉기가 한숨을 쉰다. 침묵과 먼 산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그렇다. 실낱 같은 희망이랄까. 의병에게 걸어보는 실낱 같은 희망이 서글펐던 것이다. 못 박힌 손바닥과 굽어진 등과 날로 늘어가는 흰 머리털과 지친 산천, 실낱 같은 희망을 믿을 수 없다. 이 삼사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웃으려야 웃을 수 업고 울려야 울 수도 없었던 일들, 적든 많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이, 뚜렷하게 막연하게 들려오는 궁핍의발 소리가, 이들은 견딜 수 없게 한다. 관원들의 토색질이 심하고 양반들 하시가 피눈물 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땅 보고 하늘 보고 시절 좋은 것은 축수하며 들판을 초조하게 바라 보아온 세월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내 땅이다! 내 조상이 물려준 내 땅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만큼 확실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하여 앞뒤 돌아볼 새도 없이 무너져버렸는가. 토지조사란 무슨 놈의 낮 도깨비냐. 괴상한 측량기구를 둘러메고 산산골골에 스며 들어온 주사라 하고 통역이라 하고 기수니 측량원이니, 그 양복쟁이들이 칼 차고 총 멘 순사 헌병보다 더 무서울 줄이야. 아이고 오, 하느님 맙소사! 땅을 치고 통곡한들 감나무를 쳐다보고 짖어대는 것은 강아지뿐이었다. p. 217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 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향한 길을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해주는 것. 석이는 또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가 내리 눌리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 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 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 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p. 361

 

 

 

 

「토지 5」

▨ 용정에서의 정착 ▧ 조준구와 일본 세력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서희 일행은 용정에 정착하게 된다. 19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월선의 작은 아버지 공노인의 도움을 받아 거상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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