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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 5」

by *소은* 2021. 7. 2.

「토지 5」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용정에서의 정착 ▧

 

  조준구와 일본 세력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서희 일행은 용정에 정착하게 된다.

19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월선의 작은 아버지 공노인의 도움을 받아 거상으로 성장하게 된 서희와 길상은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 하지만 함께 이주한 소작농들은 평생 해오던 농사일이 세상 가장 쉬운 일이었다는 걸 깨닫는 등 생활이 어렵다. 간도로의 이주 후 3년이 흐른 시점인 1910년부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토지 2부의 막이 올라갔다.

 

  이동진의 아들 상현과, 26살 청년이 된 길상, 혼기가 꽉 찬 서희의 이성에 대한 감정, 미묘한 그들의 내면의 밀당 표현이 섬세하다. 본가에 처가 있지만 서희를 사랑하게 된 상현의 고민과, 최첨판댁의 심부름꾼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스스로 하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길상의 서희에 대한 생각, 상현을 사랑하지만 다가오지 않는 상현에게 분노하고 길상에게 의지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짝으로 삼기도 쉽지 않는 서희의 복잡한 마음들이 여러 사건과 심리묘사로 펼쳐진다.

 


 

  "자고로 천하는 도적이 다스리는게 아니고 성현이 다스리는 게야. 성현은 도덕이 높으시고 지혜로워서 도적의 침범을 용서치 않지. 그러나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지혜로움도 땅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는 법이야.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산에 나무를 심듯이 흑심 품은 이웃이 있으면 양병을 하여 대비를 하고 이웃이 옳지 못할 때는 한발 더 나아가서 칼을 뽑아 칠 수도 있는데 학문이란 원래 사람으로서 옳게 가는 길잡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적의 방편도 될 수 있고, 칼도 마찬가지, 우리가 뽑는 칼은 내 나라를 찾기 위한 충성과 희생이지만 왜놈의 칼은 탐욕과 죄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둑의 무리 못지않게 경계를 해아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길을 배웠으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무리 말이다. 이들이 도둑과 합세하여 나라를 망해 먹은 셈이야. 첫째는 왕실, 왕실은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둘째는 고관대장,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태평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셋째는 선비들, 제 한 몸 닦기 위해 청탁만을 가려 백성들을 이끌지 못했으니 죄가 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배움에의 길은 내 나라를 위한 것, 내 겨레를 위한 것, 총도 될 수 있고 칼도 될 수 있고 분필도 될 수 있고." p. 168

  용정의 상의학교의 교사 송장환은 학생들 교육이 나라의 독립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는 경영하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 용이의 아들, 홍이의 절친한 친구 박정호는 "천지만물의 이치가 힘이나 육신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이 없는 도적이 번성할 수 없고 따라서 일본도 불원간에 망할 것"이라는 김훈장의 말을 빌어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지고 송장환이 대답하는 장면이다. 왕실, 고관대장, 선비들이 백성을 배반했다는 그의 힘 있는 어조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ㅠㅠ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안 돼."
  무심히 한 말이었지만 길상의 생각은 과식을 시켜 죽인 새 쪽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보고 잡아가면 어떡하나, 사흘을 굶고 찬비를 맞으며 울부짖던 자리를 나리는 무서워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어미는 어미대로 어쩌지 못하고 안타까울 뿐, 그랬었던 생각은 과연 순수한 염려뿐이었을까? 어미에게 돌려주기에는 서운하여 차마 그러질 못던 마음은 아니라고 잡아땔 수 있을까? 산새는 산에 두어 자연의 섭리에 맡길 일이었다. 병이 났다 하더라도 어미에게는 병에 대한 처방이 있었을 게 아니냐, 그러고 보면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죽인 결과가 되었다. 때에 따라서 애정이란 이렇게 참혹한 것일까?  p.210 
  한 생명에 대한 자비와 다른 생명에 대한 잔혹 꼬꼬리 새끼를 위해 여치의 목을 비틀어 죽인 일, 이 이율배반의 근원은 어디 있으며 뭐라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약육강식의 원칙이냐? 아니다. 사랑의 이기심이냐? 아니다. 애정의 의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선택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 이율배반의 자비와 잔혹은 영원한 우주의 비밀이냐? 
  "지금 애기씨는 내게 있어 한 마리의 꾀꼬리 새끼란 말일까? 나는 애기씨를 위해 누구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게지?"
p. 214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혼인을 못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있고 내게 있는 게 아니다. 하니 그 보상은 그대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나와 같이 겨루려 하는가? 서희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굳게 지키는 성이라 하여 어찌 창을 들고 한번 휘둘러보려 하지도 않느냐? 휘둘러보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아리송한 태도만 취하는 상현이 노여운 것이다. 휘두르고 달려드는 창을 서희는 분질러버림으로써 애정을 확인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남겨놓고 끝장을 내고 싶은 것이다. 서희는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깊은 애정으로 믿고 있었다.  p. 225

 

 

  풀잎에 손을 부벼 닦고 점심 꾸러미를 망태 속에 집어넣은 용이는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아 담배를 넣는다. 영팔이처럼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용이는 호되게 넘어져서 일어나질 못하다가 겨우 땅을 밟고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얼얼한 아픔이 상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 있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날마다 마을에서 송장이 나가던 무서운 그해,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던 그 황막한 시기를 살아남았을 때 용이는 방종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기어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용정을 휩쓸고 지나간 화재 뒤끝의 폐허 속에서 생활에 순응하던 구역질 나는 자기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 그 치욕스러운 생활로부터 행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요. 희망이 없어도 좋았다. 내 자리에 내가 돌아왔다는 안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용이 생각은 그러했고 잘게 갈라졌던 신경이 굻게 뭉쳐지면서 메말랐던 바닥에 물이 고여 드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풍요한 사랑의 물길이 되어 흐르는 것을 - 용이는 월선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p. 323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레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저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 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만금을 가졌어도 높은 베개에 깊숙이 잠드는 사람이 허다하거늘 때묻은 염낭 속의 찌그러진 구리 돈 한 푼을 갖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금녀와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금녀에게는 정말 그 자체가 삶이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금녀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참고 있는 것이다. p. 354

  김평산의 아들 김거복이 김두수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악역으로 등장한다. 조준구를 피해 왔더니 더한 놈을 만난 격이다. 아버지의 악독한 면만 쏙 빼닮은 김두수는 세상에대한 원한과 복수심에 휩싸여 있다. 용정에서 서희의 일가와 얽히게 되는 김두수의 악행이 벌써부터 두렵다. 그에게 팔려간 금녀의 앞날은 또 어찌나 막막한지. 천운으로 김두수의 손아귀에서 잠시 벗어난 금녀가 희망을 품는 것도 두려운 나머지 울부짖는 장면이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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