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를 위해 읽는 책

「인간실격」

by *소은* 2021. 6. 4.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민음사, 2004


▨ 인간성의 상실 ▧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꺼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 문단이다.

실로 충격적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부정하고 삶을 거부할 수 있을까.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을 다 끌어들여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불신, 자신에 대한 자조, 세상에 대한 비관 등으로 점철된 이 소설은 다름 아닌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 자체였다.
이런 삶을 살다 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왜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런 암울한 가치관을 가지고 죽지 못해 사는 걸까.
다섯 번의 자살시도 끝에 마침내 성공 (자살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끔찍하지만 그에게는 그야말로 성공이다 ㅠㅠ)해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소설이다.
하여 줄거리 소개대신 책에 실린 그의 약력을 그대로 싣는다.

다자이 오사무
1909년 아오모리 현 쓰가루에서 부유한 집안의 십일 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던 다자이는 도쿄 제국 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후 한동안 좌익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0년 연인 다나베 아쓰미와 투신 자살을 기도했으나 홀로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 혐의를 받고 기소 유예 처분되었다. 1935년 맹장 수술을 받은 후 복막염에 걸린 그는 진통제로 사용하던 파비날에 중독된다. 같은 해에 소설 「역행」을 아쿠타가와 상에 응모하였으나 차석에 그친다. 그는 이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듬해 파비날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정신 병원에 소용되어 크나큰 심적 충격을 받는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의 작품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고, 다자이는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인간실격」은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 '퇴폐의 미' 내지 '파멸의 미'를 기조로 하는 다자이 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1848년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다마강 수원지에 투신해,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아혀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아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p. 23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p. 27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마나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치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낮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펴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샅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진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p. 51

저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지만 '우정'이라는 것을 한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고 (호끼리처럼 놀 때만 어울리는 친구는 별도로 하고) 모든 교제는 그저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어서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열심히 익살을 연기하느라 오히려 기진맥진해지곤 했습니다. 조금 아는 사람의 얼굴이나 그 비슷한 얼굴이라고 길거리에서 보게 되면 움찔하면서 일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쾌한 전율이 엄습할 지경이어서, 남들한테 호감을 살 줄은 알았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저는 이 세상 인간들에게 과연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대단히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소위 '친구'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게다가 저한테는 '방문'하는 능력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남의 집 대문은 저한테는 저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 이상으로 으스스했고 그 문 안쪽에서 무시 무시한 용 같은 비린내 나는 짐승이 꿈틀거리는 기척을,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느꼈던 것입니다. p. 82

저는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p. 90

처세술의 재능? 저는 정말이지 쓴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한테 처세술의 재능이라니! 그러나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속이는 것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느니 하는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 얘기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p. 92

반응형

'나를 위해 읽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지4」  (2) 2021.06.11
「아무튼, 비건」  (10) 2021.06.09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2) 2021.05.13
「책 읽고 글쓰기」  (10) 2021.05.12
「토지 3」  (6) 2021.05.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