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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by *소은* 2021. 5. 13.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 수치심과 죄의식 ▧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소설로 평가받고 있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35개국에서출간되어 독일어권 문학 작품 최초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2009년 케이트 윈슬렛과 랄프 파이즈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작품으로 전미 방송비평가 협회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 제81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5세의 아이(미카엘)와 36세의 여자(한나)의 사랑 이야기.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의 의식을 치루는 이들의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위태로움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1부에서 그들의 만남과 미카엘이 한나에게 빠져드는 성애적인 표현들을 읽을때까지만 해도 좀 특이한 관계의 로맨스 소설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비밀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미카엘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체 헤어지고 또 그것으로 인해 죄를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받는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법학도가 된 미카엘이 한나를 우연히 법정에서 만나면서 펼쳐지는 2부부터는 전혀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시대적 아픔과 개인의 죄의식, 상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설이다. 11살 나이 차이의 비현실적인 주인공들의 설정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사실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의 조우를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나의 수치심과 미카엘의 죄의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좋은 책이다. 영화가 궁금해진다.

 

  나는 생각을 해서 결론을 이끌어내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결론에 집착한다. 그리고 나서 깨닫는다. 행동은 별개의 것이며 결정은 따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도 많았고 또 하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행동한다. '그것'이 내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여자를 향해 차를 몰고 가도록 만들고. '그것'이 상관에게 사생결단을 작정한 듯한 말을 하게 하고, 비록 내가 담배를 끊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게 하고,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담배를 피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담배를 끊는다. 물론 나의 생각과 결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원천이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p. 23-24)

 

  왜일까? 왜 예전에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식적인 고통이 든 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이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 (p. 43)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으 때 너무 지나치게 자신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없어 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나는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느낄 때는 아무리 큰 문제도 해결해내곤 했다. 그러나 더없이 작은 실패 하나도 내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결코 성공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은 나중에 비교해보면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기대했던 것에 비참할 정도로 못 미쳤으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실패로 느끼느냐 아니면 그것을 성공으로 느끼느냐는 오로지 나의 기분상태에 달려 있었다. (p. 74)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 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 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엔진이 고장 난 상태에서의 비행은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어 조용하다. 아주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어 시끄러운 것이 몸체와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가이 와있다. 아니면 기내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남녀 승무원들은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상태 이리라. 승객들은 어쩌면 약간 더 조용해진 비행을 특히 쾌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p. 76-77)

 

  아버지는 일단 말을 시작하자 아주 먼 곳까지 소급하여 올라갔다. 그는 내게 개인과 자유 그리고 품위에 대하여,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을 객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 등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네게 무엇이 좋은지 너보다 잘 알고 있으면 네가 마구 화내던 것 생각 안 나니?
(중략)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경우에도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p.152~153)

 

  "아니요, 난 지금 명령과 복종애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그에게는 그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겐 그들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p.163)

 

  마지막 한나의 선택은 충격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품위와 자유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수치심과 자책감을 쉽게 폄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을 응원해 줄 수는 없으나 그래도 수궁이 되는 이유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쉽지 않다. 간단하지 않다. 그 안의 수많은 감정들과 관계들과 기억들, 그에 따르는 욕구들이 버무려져서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 마는 답답하리만치 복잡한 존재이다. 그 복잡한 것들이 여기저기 잘 녹아 있는 좋은 소설이다. 이게 바로 또한 소설을 읽는 재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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