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4」

by *소은* 2021. 6. 11.

「토지4」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떠나가는 사람들 ▧

 

  4권으로 토지의 1부가 마감되었다. 1897년 한가위부터 1908년까지의 10년.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 개항과 일본의 세력 강화, 갑오개혁, 을사보호늑약을 거친 세월의 풍파가 여실히 담겨있다. 일본의 뒷배를 믿고 위세 등등해진 조준구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며, 이를 탄찰하기 위한 소작인들의 의거가 일어나지만 실패에 그친다. 그리하여 서희는 조준구의 세력에 맞섰던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간도로 떠난다. 낯선 이국 땅에서 펼쳐질 그들의 거친 삶이 벌써부터 힘겹지만 그만큼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강물을 물들여 놓고 해는 떨어졌다. 숲에서 시작한 어둠은 절간 뜨락에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사방은 본시의 적막한 장소로 돌아가고 대부분 재꾼들도 돌아갔다. 먼 곳에서 온 몇몇 사람과 함께 월선이는 절에 남았다. 재꾼들은 거의 하동에서 왔으므로 해가 떨어질 무렵 나룻배 편으로 당일에 돌아갔던 것이다.
  어둠이 오기 전에 달이 떴다. 사라져야 할 밝음과 나타난 달빛이 서로 겨루듯 잠시 사방은 엷은 회갈색으로 흐리더니 여광은 아주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달은 산허리에서 솟아올랐다. 보름달은 은가루 같은 보송한 빛을 뿌린다. 밤이 깊어지면서 은가루는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고 숲이 야기에 식어갔을 때 푸르름을 뿜어내며 달빛은 출렁이는 것이었다. 산사 뜨락의 도라지꽃, 달맞이꽃, 창백한 꽃들은 애잔하게 고개를 쳐들며 혹은 엷게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 그림자도 흔들리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 부엉이 울음이 들려온다. 처창한 적막은 저승일까 이승일까. 절간 행랑 툇마루에 걸터앉은 월선은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p. 104

 

 월선의 끝간데 없는 외로움이 마음 아프다. 용이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완전하지 못한 사랑은 그녀의 마음을 늘 한구석 허전하게 한다. 많은 걸 바랄 수 없는 마음과 떳떳하지 못한 마음, 그러나 지고지순한 그녀의 사랑. 그녀의 쓸쓸한 마음이 달밤에 빗대어져 표현된 문장들이 절절하다.  또한 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유부단한 용이의 갈등 또한 밑의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불에 단 쇠를 두 손으로 꽉 쥐는 것 같은 아픔, 가시덤불 속에 몸을 굴리고 싶었던 안타까움, 푸른 눈동자 속에 일렁이던 정염은 참으로 찬란한 희열이 아니었던가. 그것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바닥 모를 심연이요 끝이 없었던 고뇌, 그것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줄기차게 넘쳐흐르던 감정들은 싸늘한 재가 되어 핏줄을 흔들어 주는 힘이 없는 것이다. 용이는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봄볕 따스한 장다리 밭에 보승보승 핀 노랑 꽃이파리 위를 노랑 나비가 나풀거리는 것 같았던 화사한 젊은 날, 아니 어린 날 월선이를 못 잊어 울었던 소년은 장가를 들었고 꽃샘바람이 불던 이른 봄 할미꽃을 꺾어왔던 돔방치마의 어린 새댁을 연민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어진 젊은이는 가끔 우스갯소리도 했고 명주수건에 장구를 메고 맴은 돌면서 인생의 허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했었다. 월선이 돌아왔을 적에 수줍고 염치 바르고 도덕심이 굳었던 삼십의 사나이는 그러나 보승보승 핀 노랑꽃 이파리에 나풀거리던 나비는 될 수 없었다. 벌겋게 단 무쇠를 잡듯이 그 아픔은 참으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월신이 다시 종적을 감춘 후 줄이 끊겨 허공에 뜬 연처럼 이태의 세월을 보내었고 그런 뒤의 강청댁과 임이네 두 여자에게 향한 욕정의 광풍은 용이로 하여금 지옥의 밑바닥을 보게 했다. 강청댁이 죽고 임이네는 홍이를 낳았고 액병이 지나간 자리에 많은 죽음을 보았고 흉년을 겼었다. 그러나 고난에 이지러진 사내는 숙명처럼 나타난 월선이 앞에 다시 섰던 것이다. 마디마디에 못이 박힌 크다만 손, 흰 머리칼이 생기기 시작한 상투, 힘없이 늘어난 살가죽 이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러나 사내로서의 자존심은 갈등을 몰고 오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 흐미해지고 말았다. 생활의 무게를 떠밀려버릴 수 없는, 그리고 그 무게와 더불어 짐짝 같은 자기 모습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p.123

 

 

 

  대체로 신체적 불구자는 성한 사람들보다 감각이 예민하다고 한다. 천질인지 혹은 다만 병적 체구 탓인지 병수는 감수성이 빨랐다. 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 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랄까 분위기랄까. 의식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극히 탐미적인 요소를 띤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 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을 배우고 통감을 떼고 사서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 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된다. 실로 병수는 조상이 남겼을 가풍에 접한 일이 없었고 부모의 훈도를 맡은 일이 없었으며 스승의 인격을 느낀 바도 없었으나 옛날 성현의 글, 그 행간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 물론 십오 세라는 나이의 한도에서 우수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석으로 함께 기거하는 이초시도 병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엿보지 못했고 부모 역시 그러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겠으나 그들은 모두 어느 면으로서든지 범속한 인물들이었으니까. 그토록 오랜 시일 집념으로 적대해오던 길상이가 의외로 병수의 남다른 점을 감지하고 있는 듯. 세정에 밝고 처세에 능란하며 제반사에 형통하다 하여 우이에 있는 사람들이 도금된 자신들은 높이되 진토 속에 묻힌 옥을 모른다는 것은 그 자신들이 옥의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요 병수 내부에 숨은 청량한 오성을 느낀 길상은 비록 신분이 얕고 천애고아이나 조물주께서 선험을 풍부히 부여한 운명아, 많은 장님 속의 눈뜬 사람의 하나라고나 할까 왈 꼽추 도령이요 천치바보요 오줌도 가릴 줄 모른다는 사실과 억측 속에 하여간 병수는 인간 폐물로 추호의 종정 없는 낙인찍힌 존재다.  p. 137

 

  조준구와 홍씨 사이에 태어난 불구자 병수에 대한 서술이다. 소설이니까 가능할 법한 파렴치한인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 이런 자식이 태어났을까 궁금증을 낳기도 했으나, 작가의 설명처럼 부모의 철저한 무시 속에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가풍의 영향도 받지 않은 불구자로 태어난 것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준구와 홍씨의 바람대로 서희와의 혼인이 이루어지지는 않겠으나, 앞으로 병수의 역할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뒷공론이야 어떻던 모두가 서희 앞에서는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서울 대가댁을 굴러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어 매끄럽기가 비단결 같고 그 매끄러움을 무기 삼아 시골 양반들을 은근히 곯려먹는 못된 성정의 지서방도 서희는 한 수 놓고 되도록이면 걸려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소홀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알아채기만 하면 서희는 맹수처럼 이를 갈았다. 그것은 차츰 병적으로 앙진 되어갔다. 한편, 길상이나 봉순에 대해선 어떤가 하면 그것 또한 미묘한 갈등이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친밀하게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는 그들의 의식 자체를 허용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보았다. 혹은 자신을 격하하는 부례로 보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는 벌은 소리 내지 않고 목을 조르는 방법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왜 그러는지 본인들도 모르는 만큼 성미라 생각하고 참지만 그러나 그들도 이제는 머리가 커졌다. 이 같은 냉전의 북새는 길상이보다 신변에 있는 봉순이 주로 당한다.  p. 218

 

  그로 인해 봉순이는 결국 간도로의 이주의 길에 함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길상이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서희의 냉대도 참을 수 없게된 봉순이는 끝내 기생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서희, 봉순, 길상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4권의 마지막에 약속 장소에 봉순이가 나타나지 않자 내 마음이 다 서운했다. 그녀를 붙잡아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서희처럼 강단이 있지도 길상처럼 신념이 있지도 못했던 봉순이는 그저 자기를 찾아가고 싶을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반응형

'나를 위해 읽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존감 수업」  (9) 2021.07.05
「토지 5」  (3) 2021.07.02
「아무튼, 비건」  (10) 2021.06.09
「인간실격」  (12) 2021.06.04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2) 2021.05.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