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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 3」

by *소은* 2021. 5. 3.
「토지 3」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남겨진 아이들 ▧

지수의 죽음으로 서희가 고아나 다름없이 되었다 안타까워했던 「토지 2」의 포스팅이 떠오른다. 그러나 왠걸...... 「토지 3」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간다. 서희의 큰 그늘이었던 윤씨부인을 포함하여, 서희의 부모나 다름없었던 김서방과 봉선네, 문의원까지. 평사리에 역병이 찾아온 것이다. 흉년으로 힘든 한 해를 보내고 맞은 역병은 신분의 귀천 없이 찾아와 마을을 한바탕 휘젓고 돌아가고 그 여파는 최참판 댁내에 가장 큰 파도를 몰고 온다. 이제 서희에게는 봉순이와 길상이 뿐이다. 아. 절름발이가 된 수동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최가의 재산을 어찌해볼까 홍씨부인까지 대동하고 내려온 조준구의 악덕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그 서사를 견디고 읽어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린다. 이제 겨우 10살이 된 가엾은 서희를 어쩌면 좋을까.


'참말이지 봄이 왔구나.'
크게 소리를 질러보려다 그만두고 대신 길상이는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본다. 정초에는 그렇게 많은 연이 푸른 하늘에 떠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디로 떠내려가는지 모를 줄 끊긴 연 하나 없고, 찾지 못한 연은 높이 올라가서 쉼산에 닿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길상은 떠내려가는 구름이 못 견디게 좋았다. 하늘 빛깔도 좋았고 맴을 도는 소리개의 쭉 뻗은 날갯죽지, 그 날갯죽지에 올라 앉아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넣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 용솟음친다.
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길상은 목소리가 굵게 터져 나오는 이 시기가 자신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눈은 더욱 크고 서늘해졌으며 긴 목이 좀 퉁거워졌고 양어깨가 벌어졌으며 다리에는 힘줄도 생긴 이런 변모가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 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 또 하나의 이유는 최참판댁의 서희가 상복을 벗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옥색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었던 서희, 제법 늘씬하게 큰 봉순이도 서희를 따라 무색옷을 입고 입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에 가득 찬 집 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겨울이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p.44

길상이에게 봄이 왔다. 사춘기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지금이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걸 알면 진정한 사춘기가 아닐지도 모르지. 나의 봄날을 언제였을까를 생각해보게 되는 따뜻한 대목이다. 읽는 데 기분이 좋아져 자꾸자꾸 되내인다. 참말이지 봄이 왔구나.




아이들에게는 천성(天性)이 없는 것일까. 아니, 사람에게는 본시 천성이 없는 것일까. 삼 년 동안 아이들은 울고 투정하던 버릇이 없어지고 말았다. 넘어져서 이마에 피가 흘러도 울지를 않았다. 물가에서나 혹은 길가에서 끈질기게 흙을 움켜쥐고 목을 쳐드는 잡풀같이, 비가 쏟아지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문적문적 썩어가다가 속잎이 트고 다시 자라는 풀, 가뭄이 계속되어 강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지고 그래도 물기를 꼭 껴안고서 견디어내는 잡풀, 아이들은 아무것이나 잘 먹었다.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잠을 잤다. 여름에도 몸에는 이가 끓었으며 꼬챙이 같은 팔다리에는 모기가 덤벼들었고 부스럼이 난 머리통에는 쉴 새 없이 파리가 엉겨 붙었다. 아이들은 먹는 풀을 알고 있었으며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메뚜기를 구워 먹고 개구리를 구워 먹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남의 밭에서 호박을 따오고 무를 뽑아오고 콩을 훑어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 년 동안의 떠도는 생활 속에서 무엇보다 철저하게 훈련이 된 것은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야단을 맞고 배가 고프고 매질을 당하여도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 p. 80

칠성이가 죽고 남겨진 임이네와 그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두만네처럼 살인으로 처형당한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임이네는 몸을 팔아 끼니를 연명하며 지내다 3년이 지나고 살기 위해 다시 평사리를 찾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무엇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다. 사람에게는 정말 본시의 천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어린아이들도 주어진 데로 살아간다. 죽지않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지켜낸 목숨도 역병을 거스르진 못한다. 아이들 둘이 죽어나간 것이다.




윤씨부인은 자기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으리라는 예감 아래 가엾은 환이에 대한 조처를 생각해보는 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최씨 가문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기분에서, 엄청나게 불리어나간 재산의 일부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에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자기는 최씨 문중의 사람이 아니었고 다만 타인, 고공살이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의식은 그의 죄책감을 많이 무마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나는 당신네들 편의 사람이 아니요, 나는 저 죽은 바우나 간난 할멈, 월선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소. 윤씨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권위와 담력과 두뇌는 오로지 최씨문중에 시종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 115

최참판댁의 기둥이었으나 최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는 본인의 인생이 고공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리 비참할 수 있을까. 그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악스럽고 허망한 것이었다. 환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해 또 다른 아들 최치수에게도 역시 사랑을 줄 수 없었던 마음 약한 여인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씨가문을 반듯하게 잡고 있었던 윤씨부인이다. 그녀의 죽음으로 서희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가난은 이런 것이며 굶주림엔 체모가 없는 것이다. 제사 음식을 마을에 돌리고 혼례장을 찾아온 각설이떼에게는 술밥이 나누어지고 생일에는 며느리 손이 커서 살림 망하겠노라 하면서도 떡시루에 칼질하는 시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도는 그런 인정과 우애를 사람들은 순박한 농민들 기질이라 생각하지만 먹이와 직결되는 수성 또한 농민들의 기질인 것을. 풍요한 대지, 삼엄하고 삭막한 대지, 대지의 그 양면 생리는 농민의 생리요, 농민은 대지의 산물이다. 좀 더 날이 가물면 농밀들의 눈빛은 달라질 것이다.
남의 논물을 볼 때는 야비한 도둑의 눈이 될 것이며 자기 논물을 볼 때는 도둑을 지키는 험악한 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며 시기하며 언쟁할 것이요 드디어는 괭이나 쇠스랑이 무기로 변하여 피를 흘리게도 되는 것이다. p. 168

평사리에 흏년이 찾아온다. 평소 같았으면 최참판댁에서 곳간을 열었을 것이나, 조준구는 그러하지 않았다. 서서방댁이 굶어 죽고 그것을 지켜본 서서방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게 된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충격이었다. 불과 100년 전의 이야기인데, 그때는 사람이 먹을게 없어서 굶어 죽었다니. 가난하다는 것은, 당장 먹을 끼니가 없다는 것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두고 보아라. 내 나이 어리다고, 내 처지가 적막강산이라고, 지금은 나를 얕잡아 보지만 어디 두고 보아라.'
그런 앙심은 이미 아이가 가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역시 조준구다. 아침이면 봉순이를 거느리고 서희는 윤씨부인 상청에 나가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는데 조준구는 그 곡소리가 질색이었다. 온갖 저주와 최씨가문을 마지막까지 지키어나갈 것을 맹세하는 것 같은, 저주와 다짐을 하기 위해 해가 지고 다음 날이 새어 상청에 나가기를 기다린 듯, 처절한 울음이었다. 날로 새롭게 날로 결심을 굳히는 듯, 곡성을 들을 때마다 조준구는 한기를 느끼곤 했다. p. 355

어린 서희는 마냥 어릴수가 없다. 엄마가 보고싶다고 할머니가 보고싶다고 울 수도 없다. 그런 서희가 너무 안타까운데 또 그런 서희가 또 고마운 건 왜일까. 아마도 그건 동경의 마음인 것 같다. 순응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자라온 나는 서희같은 당참과 오만함을 겸비한 적당히 삐뚤어진 성격에 동경의 마음을 품는다.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더 강해지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적막강산이 높다.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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