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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읽는 책

「아몬드」

by *소은* 2021. 7. 22.

「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엮음, 2017

 

▨ 감정의 딜레마 ▧

  청소년 소설로는 드물게 스테디셀러에 오른 책이다.  표지에 그려진 아이의 무표정으로 한 번, 제목으로 또 한번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는 「아몬드」는 태어나면서부터 편도체가 덜 발달되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기의 몇년을 다룬 성장 소설이다. 여느 성장 소설과 다름없이 주인공은 여러 일들을 겪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그에겐 감정이 없으므로. 그러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까지 더해져서 그에게 놓인 상황과 일어나는 일들이 더욱 가슴 아프다. 늘 감정을 뿌리고 다니는 평범한 우리들,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기쁘고 그래서 사는 게 어렵고, 그래도 살만 하다고 말하는 복잡한 우리들을 주인공 윤재는 그저 담담히 지켜보고 있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랄다' 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한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 27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라는 병을 앓고 있다.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은 1970년대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이다. 아동이게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공포, 불안감, 등과 관련된 편도체의 일부는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윤재는 남들보다 덜 발달된 아몬드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서 가족이 살해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기쁨, 즐거움, 사랑 같은 감정도 타인과 나누기 어렵다. 그런데 난 책을 읽으면서 자꾸 윤재가 부러워지는 거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서 좋겠다. 힘든 일을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그렇다고 윤재처럼 세상에 오롯이 혼자처럼 살아가야 하는 걸 받아들일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참 이기적이구나 생각했다. 좋은 감정만 취하고 싫은 감정은 싹 도려내고 싶은 이기심. 되도록이면 면도칼로 정교하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 그게 얼마나 못된 마음인지 알면서도 자꾸자꾸 부러워졌던 게 사실이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중략)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
  그것이 죄가 될지 독이 될지 혹은 꿀이 될지 영원히 알 수 없더라도 나는 이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

  의미는 전혀 와닿지 않지만 상관없다.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의 향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모양과 획을 눈으로 천천히 좇는다. 그건 내겐 아몬드를 씹는 것만큼이나 신성한 일이었다.  p. 45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 218

 

  여기서부터는 아주 다른 얘기다. 새롭고, 알 수 없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체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p. 228

 

 

  윤재는 책 말미에 부딪쳐 보기로 했다고 말한다. 본인이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만. 그렇다 사실 윤재뿐만 아니라 편도체에 이상이 없는 우리 모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맞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 느끼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겠지. 감당이 안 되는 감정이 찾아오는 힘든 일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다 부딪히고 만나야 하는 거겠지. 어쩌면 충분히 슬퍼서 더 기쁘고 충분히 힘들어서 더 행복하고, 충분한 고통이 있어서 더욱 충만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감정의 줄타기가 힘들더라도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사는 건 다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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