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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

by *소은* 2021. 1. 20.
나의 서양미술 순례 (개정판)
국내도서
저자 : 서경식 / 박이엽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0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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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받는 위로 ▨

 의 서양미술 순례. 제목만으로 난 이 책을 오해했었다. 처음엔 단순히 서양 유명 그림들을 소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좀 의아해졌다. 곳곳에 드러나는 철저한 자기 회고와 번뇌와 혼돈들은 그대로 일기나 다름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 부모로 인해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자신을 분명한 한국인이라 생각하는 저자는 (그러나 한국말이 능통하지 못하다) 태생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살아갔으리라. 더구나 단절되었던 고국 동포들과의 고리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두 형들은 양심수로 10년 가까이 수감 중이다. 그 옥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 후 아버지마저 연이어 잃게 된다. 그 암담함을 잊어볼까 여동생과 무작정 떠난 유럽 여행길이 이 책의 시작이 된 것이다. 

 

 여행길에 무심코 들른 미슬관이나 성당에서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길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한 장의 그림, 한 덩어리의 조각상이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시작이었다. (p.18)

 

 이런 아픔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상들 속에서 그의 눈길을 끈 작품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아니었다. 책에 소개되는 그림들은 대부분 절망적이고 비참하며 아픈 상처를 꿰뚫고 있는 그림이다.

 

  망명길의 고야는 보르도를 목표로 했다니, 나를 태운 열차가 달리는 이 길은 고야가 간 그 길일 터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차가 없었지만.

 그때 생각난 일인데 옥중에 있는 형들 중 한사람에게 쁘라도 미술관의 영어판 해설서를 보낸 일이 있다. 풍부한 그림들이 단조로운 일상의 위안이 될 테고, 겸해서 영어공부도 된다면 더욱 좋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형은 그 책의 수취를 알리는 편지에 쓰기를, 우리나라는 경멸의 의미로 흔히 '반도'라고 지칭되는 수가 있는데, 스페인도 영어로 Thw Peninsula라 불린다. 둘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을 듯싶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단지 그럴까, 재미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를 달리는 밤기차속에서 새삼스럽게 나는 멀리 동쪽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우리의 '반도'를 생각했다...... (중략)

 한데 우리 '반도' 사정은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멍청해 있으려니 객실의 천장 구석이며 도어의 그늘진 곳, 혹은 차창 너머 어둠 속에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괴이하고 불길한 무엇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차 속의 무료함을 잊었다. 그들이란 바로 벨라스께스의 난쟁이와 광대들, 혹은 또 고야의 「제 자식을 먹는 사투르누스」 「주먹질 마녀의 잔치 따위 '검은 그림'의 갖가지 이미지들이다.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이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의 개미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p.110)

 

 

모래에 묻히는 개

 

 저자는 이렇게 아픈 그림들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라의 시대적 아픔과 본인에게 닥친 슬픔,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족들에 대한 애틋함 들을 풀어내는데 그림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는 그런 그가 조금은 부러워지기도 했다. 소설이나 대자연, 음악이나 드라마로는 감히 위로받았다 할 수 있었지만, 그림으로도 이렇게 삶의 위로를 받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이구나. 나도 그림을 알아볼 수 있는 섬세한 눈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림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날도 맞이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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