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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 1」

by *소은* 2021. 2. 10.

「토지 1」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대장정의 시작 ▧

 

 2021년을 시작하며 독서토론 소모임으로 토지를 한 달에 반권씩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대하소설 토지는 장장 20권. 반권씩 읽으면 40개월. 그러니까 3년 4개월이 걸릴 대장정의 시작이다.

하지만 26년의 창작 시간에 비교하자면 3년 4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송구하기도 하다.

작가는 서문을 통해 창작의 고통을 처절하게 밝히고 있다.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음 부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것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p. 10~11) - 1973년 서문 중

 

작가는 이 책은 소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라고 말하지만, 어디 과연 그러할까

20권 중에 1권을 마친 나는 벌써 토지의 팬이 된듯하다. 경남 하동 평사리에 가서 최참판댁 마을을 둘러보고 싶은 심정이다.

간난 할멈도 만나보고 용이네도 찾아가보고픈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마음이다. 독자에게 이런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새삼 그녀가 존경스러워진다. 

 

 별당아씨와 도망간 구천이는 살아있는지, 월선이는 정말 다른 남자랑 떠나버린 것인지, 평산이가 꾸미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이거야 원 너무나 궁금해서 한 달에 반권씩 읽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귀하면 귀한데로 천하면 천한 데로, 묵묵히 타고난 것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안고 살았을 그들. 사실 내 할머니의 엄마뻘쯤 되었을 그들의 인생은 그냥 소설로 치부하기엔 너무 실감 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재미있게 읽다가도 슬퍼지고, 슬프다가도 미소 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슬픔에 빠진 용이에게, 거지꼴이 다 되었다는 구천이에게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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