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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해 읽는 책

「어린이라는 세계」

by *소은* 2021. 8. 10.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사계절. 2020

 

▨ 어린이의 세계, 우리의 세계 ▧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책 편집자로,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20년 남짓 어린이들의 세계에 발 담갔던 저자 김소영의 에세이집이다. 정작 양육의 경험이 없는 저자는 아이들을 만나는 삶을 살면서도 어린이에 대해 말하는 자신이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들 "애를 안 키워 봐서 몰라." "키워보면 그런 말 못 하지."라는 말을 하고 또 듣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글은 양육의 경험 여부를 떠나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읽는 이에게 따뜻함을 전달해 준다. 그저 그 매개가 어린이가 된 것뿐이다.

 

  우리는 어린이와 완전히 관련 없는 삶을 살지 못한다. 누구든 어린 시절을 겪고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된 뒤에도 조카나 자녀 아니면 생업과 연관되어서도 어린이와 관계 유지를 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얼마큼의 크기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그냥 어린애, 아직 멀 모르는 아이들, 피곤한 사춘기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진 않았을까. 그것을 일깨워 주려는 듯, 글에서 묻어나는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환대의 마음이, 읽은 후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온기를 머금고 있다.

 

  더불어 어린이와 부대끼고 살아야 할 나의 미래를 점쳐 보기도 한다. 나도 이렇게 존중 어리고 살뜰한 마음으로 어린이들을 대할 수 있길. 그 마음이 내가 만날 어린이들에게 부디 한 줌의 양분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p. 20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p. 28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데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p.32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완벽한 날들> 중에서) p.91

 

 그런 내가 어린이를 '사랑으로'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일단, 내가 수업료를 받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선택한 어린이와 부모님으로부터 수업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런데 사랑으로 가르치면 어떻게 되나. 돈을 받아서 사랑을 주는 것이 된다. 만일 어린이와 수업을 그만하게 되면, 어린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중단해야 하나. 계속 사랑한다면 수업료를 내는 어린이들에게는 불공평하지 않나. 이쯤 되면 어떻게 해도 계산이 이상해지고, 계산을 하고 있는 나도 이상해진다. 유로 수업에 사랑을 개입시킬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직업윤리다.
 내가 '사랑'을 동원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역시 돌려 말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쓰자면, 나는 마음이 많은 것이지 인격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마음이라는 자원을 필요로 하는데, 자원이란 것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대체로 바닥이 난다. 어린이를 사랑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헤픈 나는 금방 파산하고 말 것이다. 행여 상처를 주는 어린이를 만났을 때 버틸 수 있을 만큼 내 인격이 훌륭하지도 않다. 이런 내가 자랑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p. 150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아니 몫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도 감수하는 것이 양육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을까 그것 역시 짐작만 해 본다. p.179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 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p.219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낳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p. 227

 

 나는 교육의 실패를 선언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것도 다 어린이 때문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려버리렵"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 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재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 한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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