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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토지9」

by *소은* 2021. 11. 30.
「토지9」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2

▨ 다시 조선으로 ▧


서희가 진주 땅으로 돌아오고 평사리의 집도 조준구에게서 돌려받으며 최참판댁의 복수는 마무리된다. 복수에 멋지게 성공하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에 괴로워하는 서희가 안쓰럽다. 길상은 독립운동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중국 땅을 떠돌고, 관수와 석이, 한복이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임이네의 악덕에 괴로워하며 망가져만 가던 홍이는 용이가 평사리에 정착하게 되면서 자리 잡아갈 것이 예상된다. 금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김두수의 끝 간 데 없는 악함이 놀랍다. 한복이와 거복이(김두수)의 만남이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관수는 그 말이 이해될 듯했다. 육신은 병들었으나 마음은 쉬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그 목마름, 늘 목에서 단내가 났었을 용이. 그렇다. 용이는 만사에서 물러서서 구경을 하는 심정인 것이다. 몸서리치게 추하던 임이네도 돌부처가 거기 있는 듯 분노하지 않았고 미워하지 않았고 물론 사랑하지도 않았다. 처음 간도에서 돌아왔을 때 영팔이는 봉곡으로 나가 농사를 짓게 되었고, 용이는 최참판네 마름 비슷한 직분을 갖고 작년까지 일을 보아온 터인데 지금은 그 일을 다른 사람이 맡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럭저럭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다. 임이네로 말미암아 최서희에 대하여 느껴왔던 복잡하고 미묘한 심적 갈등, 그 주술 같은 것에서 풀려나기는 월선이 죽은 후부터였지만 용이는 임이네에 대한 애증을 이제 모두 넘어서 버린 것이다.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상에서 그 미움마저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용이의 삶, 삶의 종말,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p.93

용솟음치는 용기와 굳은 신념과 영원히 이 길을 가리라 결의하는데 그 모든 사나이다운 의지 뒤에서 흐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이다. 아비에 대한 한.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한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 그 한과 슬픔은 의지처럼 결의처럼 크게 울려 퍼지는 징 소리의 꼬리를 물로 이어지는 꽹과리 소리인가. 감정은 모두가 미진하다. 미진한 것뿐이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오르는데 통곡도 못하고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적막한 겨울 바다만 같은 느낌을 석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째서 을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지 석이는 자신도 뚜렷이는 알 수가 없다. 좋다는 생각을 해본 일은 없지만 싫다는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 싫지 않은 이상 부도가 권하는 결혼이면 하는 것이고, 그렇게들 장가를 들고 있는데 홀어머니의 처지로 보나 혼기를 넘겨버린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을례는 신붓감으론 괜찮다. 석이는 몸을 뒤치며 요 위에 배를 깐다. 얼굴보다 이름자가 베개에 묻어버린 눈앞에 나타난다. 봉순이...... 기화....... 봉순이....... 기화....... 세월이 너무 길었다. p. 225


조춘에서 봄 한가운데로 성큼 건너가려는 시기에는 바람과 바람이 실어오는 흙먼지와 그 흙먼지의 내음과, 그리고 내음은 바위틈에서 마른 잔디를 비집고 혹은 담장 밑에서 돋아나는 연하고 보송보송 살찐 풀잎의 촉감을 환기시킨다. 대지의 힘찬 숨결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뻗어 올라가고 어미 짐승이 새끼 상처를 핥아주듯이 풍설에 멍든 나무의 표피를 바람은 어루만진다. 얼음이 녹고 그늘을 드리운 강물은 정다운 어머지처럼 착한 아내처럼 산자락을 감사 안으며 모질었다 겨울 얘기를 하면서 흐느껴 우는가. 까치는 날깨가 찢어지게 나뭇가지를 몰어 나르며 동우리를 만들고 흙벽을 뜯어먹으면서도 아기는 자란다. 아아 그리고 가랑잎같이 매달려 겨울바람을 견디어낸 번데기는 지금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죽음에서 떨치고 일어나려는 몸부림, 몸부림, 몸부림은 온 천지에 충만하여 신음하고 포효하고, 정년 봄은 장엄하고 처절한 계절인지 모른다. 신비와 경이에 가득한 생명의 위대한 현장 인지도 모른다. p. 227


걸레같이 낡은 잿빛 판자 울타리며 무너진 돌담에도 황혼은 아름답다. 그러나 거짓이다. 홍이는 퍼뜩 그런 생각을 한다. 죽음의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도랑의 물이 황혼에 물들어 보이는 것은 시간이며, 시간은 머물러주지 않는 거짓말쟁이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송두리째, 모든 것은 거짓이요. 진실 아닌 것만 같다. 죽음도 삶도 비참한 건데, 비참하고말고, 홍이는 터벅터벅 걷는다. 어제 비가 내린 덕분에 공기는 싱그럽고 땅은 부드럽다. p.290


십육 년 동안 나서자란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행복하기는커녕 고독하고 비참한 기억뿐이었다. 다섯 살 때 생이별한 모친의 얼굴은 기억 속에도 흐미하였고 발작적인 기침 소리가 지금도 귀애 생생한 부친은 단 한 번도 딸에게 애정을 보인 일이 없었다. 엄격하기는 했으나 사랑의 손길을 보낸 사람은 오직 할머니 한 사람이었다. 그 윤 씨가 어미를 앗아간 사내 구천이의 생모라니, 해란강 강가에서 남편 길상이가 들려주었던 윤 씨의 비밀은 하느님 맙소사! 아아, 하나님 맙소사! 서희를 절규케 하였다. 서희는 생각했다. 최참판댁 가문의 말로는 세 사람의 여자로 하여 난도질을 당한 것이라고. 윤 씨는 불의의 자식을 낳았고. 별당아씨는 시동생과 간통하여 달아났으며 서희 자신은 하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러한 기막힌 일들이 불가피하게 숙명의 실꾸리에 얽혀 되어졌다 하더라고 서희는 참으로 오열 없이 그 일들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p. 349



2021.10.02 - [나를 위해 읽는 책] - 「토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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