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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읽는 책

「천 개의 파랑」

by *소은* 2021. 11. 19.
「천 개의 파랑」 천선란, 허블, 2020

▨ 아름다운 낙마 ▧

<천 개의 파랑>은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작이다. SF를 매개로 하지만 여느 과학소설처럼 무작정 신비롭거나 난해하지 않고 두발을 꽂꽂히 땅을 밞고 아픔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녹여내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태어난지 삼년만에 안락사의 위기에 처한 경주마 투데이와 그와 '호흡'을 맞춘, 어떠한 결함으로 인해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가 있다. 온갖 궂은 일과 위험한 일은 이제 휴머노이드에게 맡길 수 있어 좋지만 반면 로봇에게 알바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한,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투데이와 콜리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진다. 로봇과 함께 하든 안하든 인간이 관계 속에서 사는건 비슷하다. 그게 당연한 것일진데 그게 또 다행으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동물을 사랑하고 로봇과 교감하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이질감없이 섞여 들어가 속도를 조금 늦추자고, 조금 덜 빨라도 된다고 소리친다.
이야기의 끝을 읽고 꼭 소설 첫장을 다시 들춰야만 비로소 소설을 마칠 수 있다. 콜리의 카메라로 된 눈에 비쳤을 천 개의 빛깔을 지닌 하늘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러나 그 하늘을 그저 데이타로만 여기지 않았던 그 마음을 어쩌면 우리 인간이 먼저 깨달아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p. 113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보경은 콜리의 질문을 받자마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콜리는 이가 나간 컵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쳐다보며 보경의 말을 기다렸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골아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p. 204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린다는 거잖아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 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연제는 은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어디서 누구와 있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친구들은 연재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왜 항상 갑자기 집에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연재는 덤덤하게 은혜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연재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p. 326

지수는 여전히 성난 투로 말했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연재는 그런 지수에게 아쉽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완전치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었다가는 지수에게 평생 놀림을 받을 것 같았으므로 연재는 꾸역꾸역 참았다. p.329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듯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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