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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읽는 책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by *소은* 2021. 10. 28.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창비, 2021


▨ 젊음의 아픔 ▧


김금희의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치기 어린 젊음의 날들을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불안과 흔들림, 아픔의 진통을 겪어내는 이들의 살아냄에 대해 쓴 단편들의 묶음이다.
젊음에는 막연한 미래의 두려움도 늘 디폴트로 담겨 있기 나름이지만 또 하나 늘 따라오는 주제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아닐까 한다. 미숙함으로 인해 완성할 수 없었던 사랑의 순간들이 각 작품마다 담겨 있는데 그것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보다는 풋풋함은 느끼게 되는 나는 이제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ㅠㅠ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러하다.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크리스마스에는
마지막 이기성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기괴의 탄생
깊이와 기울기
초아

그렇게 해서 아프게 하면, 고통이 느껴지면 기이한 안도와 충족감이 찾아왔다. 모든 상황이 불행 쪽으로 아귀가 맞추어지고 그것이 온당하며 지금과 다른 삶이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낙담 쪽으로 나 자신을 미는 힘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런 것도 생장의 힘이었을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그저 여여한 성장을 이루는. 독서실의 우리는 대개 서로를 잘 몰랐고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할 뿐이었지만 그런 공기랄까 정조랄까 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열패감과 울분, 불안과 무기력으로 압착된 독서실 안에서 저마다의 편벽과 강박을 들키며 계절들을 건너가고 있었다. 맞은편 재수생은 습관처럼 에효 죽어, 그냥 죽어,라고 자조하곤 했는데, 나는 스스로 그렇게 상처를 내는 행위에 몰두해 있다가도 그 말이 들리면 정신이 들면서 나무관으로 가려진 맞은편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중에 -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거잖아요




그가 유키코에게 마음을 고백한 장소도 그곳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그 앞에서 만나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있을 때었다. 배가 고팠는지 한창 열중해서 먹던 유키코가 멀리 보이는 교내의 숲과 지금 그들의 발 앞에 놓인 땅을 손가락으로 이으며, 날아온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심지 않아도 저 숲에서 자라는 것들이 날아와 여기에 자리 잡는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흘에 한 번씩 뒤엎고 갈아가며 필요 이상의 개간 작업을 한 공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언가 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날아와서. 행로와 목적도 없이 날아와서 여기에.

그러니 그날의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살아 있는 것들의 이동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 <마지막 이기성> 중에 -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건 어쩌면 이루지 못할 꿈이 있다는 것 아닐까




가는 길에 말 그대로 인파를 연속해서 맞았다. 섬에서 그곳이 파도에 파도를 더하는, 그만큼 물살이 센 바다라 죽은 사람도 많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것이 내게 해당하는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는데, 지하도를 걸으며 사람들로 만들어진 파고가 이렇게 끊임없이 내게 왔다가 무심하게 통과해 뒤편으로 사라지는구나 싶자 나의 어떤 것이 위태롭게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자꾸만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네게 와서도 나를 식별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가는,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때문에 내가.

- <깊이와 기울기> 중에 -


여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추풍령에서의 그 밤을 자주 떠올렸다. 그럴 때 초아는 맹랑하게 웃고 있기도 하고 어느 날은 화가 나 있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내게도 여유자금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매수에 나서라고 진지하게 조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한 대상이 되살아나는 건 결국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나는 승현에게 잠시 헤어져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는데, 바로 그것이 그 시간들의 복원이 이끌어낸 변화였다. 승현이 돼 그런 요구를 하는지 물었을 때 설명하기는 난감했지만 나는 그것이 나 스스로에 대한 정당한 대접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 <초아>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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